자캐 커뮤니티

은시계

삶을 이루는 대부분의 것들은 과거에서 온다. 이런 일이 있기에 저런 일이 있고, 이런 삶이 있기에 저런 삶이 생겨난다. 삶은 자신의 과거에 독립적이지 않으며, 그 누구도 이런 연쇄의 고리에서 자연스러울 수는 없다. 흰 민들레가 피는 것은 그 주변에 한때 흰 민들레가 뿌리를 뻗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네페트가 피아졸라에 입적된 이유는 네페트의 친모가 사망했...

그는 증인은 아니어도 증거품일 수는 있었다.

그는 타인의 너머를 들여다 보는 법을 잘 알았다. 조금 과할 정도로, 잘. 그러나 관찰자의 삶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던가? 쓰는 기관은 발달하고 그렇지 않은 기관은 퇴화한다. 그것이 진화의 법칙이라면, 사람 하나가 완성형이 되어가는 과정도 그와 비슷할테다. 버려지고 유실되는 재능이 있는가 하면 찬란하게 꽃피우는 재능이 있듯이. 상실의 기간동안 당신이 곰곰 ...

너를 다시 만나면 네가 있는 우주에서 깨어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함께 있는 동안에 다 웃고, 다 울고, 너무 환한 우주 복판을 천천히 걸어 다니며, 따뜻한 밀크티와 단단한 복숭아 조각을 나눠 먹으며, 노래도 하고 춤도 추겠다고 다짐했어. 길을 잃으면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사랑에게도 일러주어 나는 여전히 신실한 나...

잘자요, 내 친구.

안녕히, 진실로 명복을 빈다.올 여름에는 너무도 많이 헤어지는구나./기형도, 참회록 우리가 만난 것은 선의가 유행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처음 난 것들에게는 저마다 이유가 있어 이름이 붙는다는데, 당신은 사람 대신 공허의 눈을 하고 있었으므로 당신의 이름은 시린 자흐로미 대신 첫 재앙이 되었다. 기실 생애의 가장 깊숙한 첫울음을 당신의 이름과 함께 삼켰으니,...

우리에게 남은 계절이 겨울 뿐일지라도

어떤 상처가 있다. 헤지고 너덜하게 봉합되어 녹슬고 곪아버린 상처들. 동탄을 속에 넣은 채로 새 살이 돋아서 영원히 사람을 고통스럽게 할 상처들. 과거는 엄혹하고 아름답지 않겠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내달리다가는 자신이 무슨 생애를 바랐는지조차 잊어버리는 게 인간이라서, 시선에 덧날 것을 알면서도 자주 어루만졌던 상처가 있었다. 시린의 손금에서 시작되...

우리는 더 어두워져야 했다.

잘 만들어진 비극에는 대부분 매끄러운 종류의 악역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형성되는 법이다. 비극 하나, 인간 하나, 악역 하나. 이렇게 셋만 있어도 인간은 비극을 창조할 수 있는 종種이 된다. 고대의 인간들은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 겪는 비극을 연기함으로서 일반인들에게는 카타르시스를 부여하고 작은 폴리스 안에 묶여 억압되던 폭력의 충동...

그대, 얼마나 안녕했는지.

가끔은 꿈을 꾼다. 가장 사랑하는 것들과 함께 바다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꿈이다. 삶이 좌초되려고 들 때 선두에 선 우리는 망가짐을 직감하는 종류의 종種이었다. 끙끙 앓기만 하기에 생애는 너무 길었다. 어제가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이 내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날이 있었다. 있는 힘껏 부정하기 위해 입을 벌린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

너무 오래 손을 담구지 말자고.

하나의 시련이 있었다. 그리고 아스트리드는 그걸 삶이라고 고쳐 불렀다. 그렇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세월이었던 탓이다. 하늘에 달이 떠있기에 이 지구가 아직 물에 잠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달이 없이 잠겨 들어가는 세상이었다. 온 지척이 물이고, 붙잡을 것들은 미약하야. 함께 헤엄치겠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속으로 곪아가는 것을 그는 인생이...

착란 같은 영원이었을까.

매번 두 손 모아 기도하면서도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던 예수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네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경전이 바람이라면 그는 그 무수한 속삭임 속에 어디를 향해 흔들려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몸을 굽힌 사람 하나였다. 비참하거나 비천하거나. 둘 중 하나로 구별되는 인생이 있다면 아마 제 삶은 그 둘 사이 어딘가의 ...

유포리아!

손이 아찔하게 아려왔다. 후끈하니 열이 달아오르는 감촉을 보면 아마 단단히 손등이 붉어졌으리라는 사실정도는 알 수 있었다. 푸른빛에 가까운 시커먼 그림자가 당신의 얼굴 위로 불분명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린은 음영 안에, 한 걸음 바깥에는 어슴푸레한 빛 아래에 선 아스트리드가 있었다. 그래, 이브가 삼킨 열매는 신의 손을 내치고 낙원 바깥으로 도망하게 만들...

펜로즈의 계단

겨울이었다. 사람 하나가 걷고 있었다. 얇은 감장 목폴라에 긴 코트자락이 바람을 먹고 부풀어 올랐다. 괴팍한 모자의 뜻 모를 소리를 기억했다. 주변의 소음도. 기대에 찬 심장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순간이 그곳에 있었다. 이상하게도 무언가를 알 것 같았다. 몰락한 영웅들의 예언보다 확고부동한 계시가 새빨간 입술로 속삭였다. 그리핀도르! 그에게 제 기숙사는 ...

펜로즈의 계단

*검은 바탕에서만 보이는 글씨가 있습니다. 검은 바탕에서 한 번, 흰 바탕에서 한 번 읽어주세요. 어둠 속에서 누군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벨은 손을 흔들어 주는 대신 입을 열어서 이름을 불렀는데, 목소리는 밖으로 비어지는 대신 왈칵 쏟아졌다. 버석버석한 드라이플라워가 발치에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분명 죽은 꽃일텐데 꽃향기가 지나치게 짙다는 생각을 하면서,...